요즘 초중고등학교의 교육현장에서 대놓고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우는 일은 이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일것이다. 그런데 내가 '국민학생'이었던, 80년대를 돌아보자면, 적어도 나는 반공으로 아주 덕지덕지 점철된 시간들을 보내왔던것 같다.(물론 나보다 더 연배가 높으신분들에 비할수는 없겠지만.)
반공글짓기.반공웅변대회.반공포스터.반공스크랩.반공표어.
이렇게 말하면 과연 이인간 나이가 몇이야?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나이는 그리 많지 않다. 78년생. 전두환과 노태우를 '국민학생'시절 접했던 새파랗게 젊은 20대.
내가 다녔었던 초등학교가 신촌에 위치한. 쉽게 말해서 전두환의 본진과 앞마당(노태우의 집) 근접해있었던 곳이라 그런게 더 심했던것인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전라도 목포에서 '국민학생'시절을 보냈던 나의 여자친구님께서는 내가 받았던 반공교육들을 말하자면, "거짓말. 말도안돼. 벙까지마." 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시곤 하시지. 물론 그녀도 나랑 동갑내기.
그냥 그때 그시절을 돌이켜보다가, 머릿속을 문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시절 나름대로 신동소리 들으면서 잘나갔던 시절이라(뭐 국민학교때 잘나가지 않았던 사람이 누가있냐는 말씀은 정중히 반사^^) 오만 상들을 쓸어모으던 시절이라, 혹시 상장같은것으로 그런 흔적들이 남아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20여년전의 흔적과 증거자료들을 더듬어 가기 시작했었다. 물론 세월이 워낙 오래지난지라, 많은 자료가 유실된 상태였고, 그나마 몇가지 증거물을 찾아내는 수확을 거둘수 있었다.
과연 국민학교 2학년짜리 '어린이'가 도대체 어떤 '투철한 애국정신'을 발휘하였기에 타의 모범이 되었던것일까...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한가지 분명한것은, 국민학교 2학년짜리 코흘리개에게도 6월 25일 보훈의 달 행사에서 투철한 애국정신을 요구했던 제 5공화국 전두환과 대한민국이 있었다는것. 한가지 또 기억나는건, 그때 나와 내 친구들이 흥얼거렸던 노래.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2절은 잘 기억이나지 않는다.) 6.25의 노래.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노래를 중얼거리는 국민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마치 지금 우리가 북한의 꼬마 아이들의 선전용 영상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과 비슷한 느낌.
반공독후감 쓰기. 과연 국민학교 2학년 시절의 나는 과연 어떤 글을 써내려갔던 것일까...
반공교육은 노태우정권들어서도 여전히 이어졌다는 명백한 증거. 물론 그당시의 나는 노태우대통령님을 참 좋은사람이라 생각했었고, 그것은 당시 민족민주운동진영과 재야의 이미지정치의 실패일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반공이데올로기'의 효과적 선전의 측면도 부인할수 없을듯.
물론 그림그리는데는 재능이 전혀없었기에, 반공포스터같은 미술관련 상장들은 없고, 어린시절에는 목소리가 크지 않았던 꼬마아이였기에 반공웅변대회의 상장도 없다. 그러나, 머리에 내 아련한 기억속에는 반공의 기치를 '이 연사 소리높여 외쳤'던 그때 그시절 반공웅변대회와 친구들의 기억이 존재한다.
반공. 이제 조금은 흐릿해져가는 코드일수도 있겠다. 물론, '반공'이란 정서가 이땅에서 완전히 일소되었다 평가할수는 없으나, 적어도 94년 한국통신 노조의 파업을 '반공'이데올로기로 몰아부치며, 배후에 북한이 있다는 식의 탄압이 가능했던 시대보다는 진일보한것이겠다.(물론 노조의 파업을 짓밟는대 선봉대장이었던 '반공'을 대신해, '집단이기주의'니 '귀족노조'니 하는 말들이 그자리를 채우고 있다.)
생각해보면 감히 일개 방송사의 PD수첩이 황우석교수를 검증했다고 길길이 날뛰셨던 분들께선 고개를 돌려 97년말을 떠올려보시면 좋겠다. 그때 조갑제같은 극우인사를 필두로한 극우세력들과 한국논단(이라는 별시덥잖은 극우잡지)이 대통령후보들의 '사상을 검증'하겠다며 메이져방송사에서 사상검증의 굿판을 벌이기도 했던것을 기억하시나? 물론 그들이 검증하려했던건 이회창도 아니였고, 이인제도 아니였고. 바로 한사람 김대중 전대통령이었다. 그 20세기말에 펼쳐진 쪽팔린 사상검증의 굿판의 중심에는 '반공'이 있었다. 딱까놓고 이놈이 '빨갱이'인지 아닌지를 검증하자는것이었고, 실상은 그 사상검증토론회를 통해, 그해 대선에 임하는 김대중에게 뭔가 미심쩍은 그런 혐의를 알게 모르게 풍김으로서, 과거 박정희가 그랬던것 처럼 그런식으로 선거전에서의 승리를 꿈꾸는 의도가 있었을것이다. 기억못하시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당시 97년 대선투표일 자정. 그러니까 투표개시를 6시간정도 앞둔 그 야밤에, 한나라당의 대변인 논평은 정말 가관이었다. 뒷배경의 CG가 남한의 모습에서 점차 붉은색으로 변하는 그래픽을 내보내면서, '과연 믿을수 없는 사람에게 이나라를 맡기시겠습니까.' 라는 대변인의 멘트. 이게 정말 97년말에 일어날법한 일인지 한탄했던 기억이 난다. (조선일보의 만행들이야 두말할나위도 없고) 그해 대선에서는 이땅에서 또하나의 민감한 화두중 하나인 병역문제에 이회창후보가 태클걸렸기때문인지. 아니면 이땅 민중들의 의식이 반공이데올로기의 자극따위는 이미 초월한 의식수준을 가졌기 때문인지. 어쨌던 야당후보였던 김대중후보가 당선이 됬었다.
반공에의 추억. 그 치열했던 80년대를, 많은 사람들이 피흘리고, 온몸으로 항거하며 죽어갔었던 그때 그시절을, '하늘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무임승차했던 나에게도 그 어린 나에게도 '반공'에의 추억은 살포시 남아있다. 똘이장군과 함께. 이승복과 함께...
반공글짓기.반공웅변대회.반공포스터.반공스크랩.반공표어.
이렇게 말하면 과연 이인간 나이가 몇이야?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나이는 그리 많지 않다. 78년생. 전두환과 노태우를 '국민학생'시절 접했던 새파랗게 젊은 20대.
내가 다녔었던 초등학교가 신촌에 위치한. 쉽게 말해서 전두환의 본진과 앞마당(노태우의 집) 근접해있었던 곳이라 그런게 더 심했던것인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전라도 목포에서 '국민학생'시절을 보냈던 나의 여자친구님께서는 내가 받았던 반공교육들을 말하자면, "거짓말. 말도안돼. 벙까지마." 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시곤 하시지. 물론 그녀도 나랑 동갑내기.
그냥 그때 그시절을 돌이켜보다가, 머릿속을 문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시절 나름대로 신동소리 들으면서 잘나갔던 시절이라(뭐 국민학교때 잘나가지 않았던 사람이 누가있냐는 말씀은 정중히 반사^^) 오만 상들을 쓸어모으던 시절이라, 혹시 상장같은것으로 그런 흔적들이 남아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20여년전의 흔적과 증거자료들을 더듬어 가기 시작했었다. 물론 세월이 워낙 오래지난지라, 많은 자료가 유실된 상태였고, 그나마 몇가지 증거물을 찾아내는 수확을 거둘수 있었다.
과연 국민학교 2학년짜리 '어린이'가 도대체 어떤 '투철한 애국정신'을 발휘하였기에 타의 모범이 되었던것일까...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한가지 분명한것은, 국민학교 2학년짜리 코흘리개에게도 6월 25일 보훈의 달 행사에서 투철한 애국정신을 요구했던 제 5공화국 전두환과 대한민국이 있었다는것. 한가지 또 기억나는건, 그때 나와 내 친구들이 흥얼거렸던 노래.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2절은 잘 기억이나지 않는다.) 6.25의 노래.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노래를 중얼거리는 국민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마치 지금 우리가 북한의 꼬마 아이들의 선전용 영상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과 비슷한 느낌.
반공독후감 쓰기. 과연 국민학교 2학년 시절의 나는 과연 어떤 글을 써내려갔던 것일까...
반공교육은 노태우정권들어서도 여전히 이어졌다는 명백한 증거. 물론 그당시의 나는 노태우대통령님을 참 좋은사람이라 생각했었고, 그것은 당시 민족민주운동진영과 재야의 이미지정치의 실패일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반공이데올로기'의 효과적 선전의 측면도 부인할수 없을듯.
물론 그림그리는데는 재능이 전혀없었기에, 반공포스터같은 미술관련 상장들은 없고, 어린시절에는 목소리가 크지 않았던 꼬마아이였기에 반공웅변대회의 상장도 없다. 그러나, 머리에 내 아련한 기억속에는 반공의 기치를 '이 연사 소리높여 외쳤'던 그때 그시절 반공웅변대회와 친구들의 기억이 존재한다.
반공. 이제 조금은 흐릿해져가는 코드일수도 있겠다. 물론, '반공'이란 정서가 이땅에서 완전히 일소되었다 평가할수는 없으나, 적어도 94년 한국통신 노조의 파업을 '반공'이데올로기로 몰아부치며, 배후에 북한이 있다는 식의 탄압이 가능했던 시대보다는 진일보한것이겠다.(물론 노조의 파업을 짓밟는대 선봉대장이었던 '반공'을 대신해, '집단이기주의'니 '귀족노조'니 하는 말들이 그자리를 채우고 있다.)
생각해보면 감히 일개 방송사의 PD수첩이 황우석교수를 검증했다고 길길이 날뛰셨던 분들께선 고개를 돌려 97년말을 떠올려보시면 좋겠다. 그때 조갑제같은 극우인사를 필두로한 극우세력들과 한국논단(이라는 별시덥잖은 극우잡지)이 대통령후보들의 '사상을 검증'하겠다며 메이져방송사에서 사상검증의 굿판을 벌이기도 했던것을 기억하시나? 물론 그들이 검증하려했던건 이회창도 아니였고, 이인제도 아니였고. 바로 한사람 김대중 전대통령이었다. 그 20세기말에 펼쳐진 쪽팔린 사상검증의 굿판의 중심에는 '반공'이 있었다. 딱까놓고 이놈이 '빨갱이'인지 아닌지를 검증하자는것이었고, 실상은 그 사상검증토론회를 통해, 그해 대선에 임하는 김대중에게 뭔가 미심쩍은 그런 혐의를 알게 모르게 풍김으로서, 과거 박정희가 그랬던것 처럼 그런식으로 선거전에서의 승리를 꿈꾸는 의도가 있었을것이다. 기억못하시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당시 97년 대선투표일 자정. 그러니까 투표개시를 6시간정도 앞둔 그 야밤에, 한나라당의 대변인 논평은 정말 가관이었다. 뒷배경의 CG가 남한의 모습에서 점차 붉은색으로 변하는 그래픽을 내보내면서, '과연 믿을수 없는 사람에게 이나라를 맡기시겠습니까.' 라는 대변인의 멘트. 이게 정말 97년말에 일어날법한 일인지 한탄했던 기억이 난다. (조선일보의 만행들이야 두말할나위도 없고) 그해 대선에서는 이땅에서 또하나의 민감한 화두중 하나인 병역문제에 이회창후보가 태클걸렸기때문인지. 아니면 이땅 민중들의 의식이 반공이데올로기의 자극따위는 이미 초월한 의식수준을 가졌기 때문인지. 어쨌던 야당후보였던 김대중후보가 당선이 됬었다.
반공에의 추억. 그 치열했던 80년대를, 많은 사람들이 피흘리고, 온몸으로 항거하며 죽어갔었던 그때 그시절을, '하늘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무임승차했던 나에게도 그 어린 나에게도 '반공'에의 추억은 살포시 남아있다. 똘이장군과 함께. 이승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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